전 AV배우가 말하는 "독자의 욕망과 PC의 시대"


이 칼럼을 쓴 작가의 이력이 매우 특이함


성적욕망을 포함한 독자들의 ‘욕망’을 시대의 변화상과 함께 다루는 글인 만큼


배경을 알아두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짧게 소개해봄




스즈키 스즈미(鈴木涼美, 1983~)


"한 가지 틀에 내 정체성이 갇혀버리는 게 싫어서, 낮과 밤의 세계를 왔다 갔다 했다."




- 날라리로 살다가 고3부터 공부 시작해 게이오대 입학


- 재학 중 호빠남친 따라 놀다가 AV업계 진출, 70편 이상 출연


- 도쿄대 대학원 학제정보학부 입학


- AV배우 경험을 주제로 한 석사논문 제출, “AV배우의 사회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 졸업 후 신문사 기자로 취업


- AV배우 경력이 폭로되어 신문사 퇴사


- 현재는 잘나가는 전업 작가


- 대표작 “몸을 팔면 작별이야, 밤 언니의 사랑과 행복론” (영화화 됨)




글이 엄청난 통찰을 주는 것까진 아니지만 부분부분 굉장히 공감 가는 부분이 있어서 옮김


그리고 문장을 걸핏하면 열 줄 넘게 안 끊고 써서 읽기가 너무 힘듦… 그래서 전반적으로 문장 좀 끊고 의역함


대충 보셈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있는 구원


스즈키 스즈미鈴木涼美(작가)




이세계 판타지라는 장르가 만화 세계에서도 탄탄한 위상을 쌓은 지 오래다.


그 계보를 따라 “귀멸의 칼날”이나 “진격의 거인”과 같은 대히트 작품도 그 일부로 널리 포착되었을 때 시대가 요구하는 드라마의 모습이 보인다.


에세이, 칼럼, 소설 등의 필드에서 지금 위세를 떨치는 작가가 말한다.






판타지를 통함으로 인해 비로소 드러나는 욕망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판타지의 세계관이나 어떤 웅장한 이야기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 옛날 작품 중에는 “구인 사가”나 “데빌맨”에 포함된 BL적 요소 등이 떠오르고,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그리는 여성 캐릭터에 일부 열광적 신봉자가 있는 것도 떠오른다. 개중엔 로리콘이나 SM 성향, 능욕적 폭력 묘사와 같이 작가의 성적 도착이 짙게 반영되는 것도 있고, 독자들의 욕망과 호응하는 형태로 창조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되자계(’소설가가 되자‘에서 쏟아지는 쓰레기들-역주)’ 애니메이션에 자신을 투영하는 독자가 현실의 갖은 절망 속에서 이제 이세계로 전생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고 도피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 역시 이세계의 역할 중 하나다.





애니화 작품도 화제가 되었던 “메이드 인 어비스”가 계승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섬뜩하게 받아들여지는 어떤 도착(倒錯)적인 페티시가 어떤 사람들의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것이 표현되는 장소가 만들어진 설정일 필연성은 더더욱 높아진다. 예를 들어 신체 일부가 녹아내리거나 인외의 것으로 변질되는 모습은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는 관찰하기 어렵고, 그것이 일어날 만한 환경을 무대로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지금 사는 현실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가치관도 이치도 판이한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다면 잔인하거나 징그럽다는 감정이 허용 범위에 들어맞게 된다. 이때 작품이 가진 성적 욕망은 판타지 그 자체와 강하게 상호보완적으로 결합한다.




설정 의존형과 캐릭터 의존형






최근에는 스테파니 마이어의 베스트셀러 소설 원작 “트와일라잇” 시리즈 등 서구권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흡혈귀 영화에도 설정과 강하게 결부되어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많다. 아름다운 인외의 존재가 피를 빨아먹는다는 것 자체가 기묘한 흥분으로 이어질 때 작품의 팬들은 직접적으로 그 판타지를 원하게 될 것이다. 미소년의 뾰족한 치아가 피부를 뚫고 피를 빨아들이는, 체험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그 상황을 스크린으로 보고 심쿵하는 것, 즉 그 세계에서만 가능한 광경이 성욕에 작용하니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판타지가 판타지로 그려진 보람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역시 흡혈귀를 그려 만화로도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기록적인 성공을 거둔 “귀멸의 칼날”은 경우가 다르다. “귀멸의 칼날”이 환기한 욕망은 혈귀가 여기저기 출현하는 다이쇼 시대라는 세계관과도, 사람이 인외의 존재로 변해 사람의 피를 탐한다는 설정 자체와도 그리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곤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은 혈귀가 피를 빨아들이는 묘사 자체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설정과는 완전히 분리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한 컷으로 생각해도 어색하지 않은 인간관계나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한 캐릭터 조형 등이 널리 사랑받았다.




“트와일라잇”에 비해 “귀멸의 칼날”에 성적 흥분을 포함한 열광 요소가 적은가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니다. 인간의 판단력을 잃은 여동생을 지켜내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그가 입대하는 귀살대 소속 다양한 성격의 캐릭터, 형제애, 사제애와 같은 캐릭터들 간의 관계성에 독자들이 저마다의 ‘심쿵’하는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정도 대히트를 터뜨렸다고 생각한다.


이 열광하는 형태의 유형을 일단 ‘설정과 더 강하게 결합된 욕망’과 ‘이야기나 캐릭터와 더 강하게 결합된 욕망’으로 나눠보자. 현재 넓은 세대에게 받아들여지고 욕망을 자극하는 이세계 판타지는 “메이드 인 어비스”나 “트와일라잇”으로 대표되는 설정 의존형보다 “귀멸의 칼날”로 대표되는 이야기·캐릭터 의존형의 존재감이 더 커 보인다. 표현을 조금 바꿔서 써보자면 제작진의 예상대로 팬을 얻는 것이 전자, 제작진 측의 예상을 넘은 의외의 곳에서 팬층을 늘리는 것이 후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만화지 연재면서 폭넓은 연령층의 여성 독자를 얻은 “귀멸의 칼날”이 충족시키는 욕망 일부분은 과거의 “캡틴 츠바사”나 “테니스의 왕자” 등 BL 동인이 많이 파생됐던 소년 만화가 담당한 것이다. 또 다른 일부분은 “NANA”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등 인간관계(연애관계)에 흥미를 두는 순정만화가 담당한 것이기도 하며, 혹은 전통적인 동화가 보완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기담이 판타지 설정을 굳이 필요로 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성 독자를 끌어들이는 소년 만화


“귀멸의 칼날”은 배경이 다이쇼 시대의 일본이다. 그래서 JRPG가 선호하는 “반지의 제왕” 같은 하이 판타지 설정-이른바 ‘검과 마법 이야기’에 비해 ‘지금 여기’와의 간극이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도 혈귀에게 가족을 습격당하기 전까지는 산악지방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실제로도 있을 법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탄지로가 눈앞에 닥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지켜야 할 것과 꾸준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동료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습에서 많은 독자가 그 인간성에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인간성도, 여동생 네즈코를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내는 모습도, 특수 능력이나 혈귀의 성질과 강한 연관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여성 독자들을 열중시킨 요소 중 하나는 귀살대와 혈귀의 다채로운 캐릭터들이다. 겁이 많고 한심하지만 은사에 대한 마음을 품은 강함과 재능을 가진 젠이츠, 무표정하고 냉정하며 강하지만 과거의 빚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함을 가진 기유, 어리고 천진난만한 일면과 언밸런스하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무이치로, 와일드하고 거칠지만 때때로 아이처럼 귀여운 이노스케, 의지할 만하고 책임감이 강한 렌고쿠, 난폭하고 폭력적이지만 그 속은 누구보다 동생에 대한 강한 심지와 상냥함이 있는 사네미. 남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불운이 겹친 아카자나 강한 콤플렉스를 안고 어둠 속에서 살아온 코쿠시보 등 혈귀들 또한 악하면서도 슬픔을 안고 있다.






캐릭터성이 돋보이는 남성 캐릭터가 잔뜩 있는 건 여성 오타쿠들이 미치는 소년 만화의 전통적인 구도를 따르고 있으며, 최근의 ‘오시(최애)’ 컬쳐와도 잘 어울린다. 이는 역사 만화 “킹덤”이 무장의 특징을 그려내며 팬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과 같은 작용을 하며, “하이큐!” 등이 계승하는 집단 스포츠 만화가 각 선수의 강점과 약점을 그리며 필연적으로 만들어 온 인기 캐릭터 랭킹 등의 문화와도 겹친다.



덧붙여 이 만화의 특징 중 하나는 각각의 캐릭터의 인물 조형을, 과거의 일로 인해 생긴 상처를 회상하는 것으로 해설해 나가는 알기 쉬운 구도로 그린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연재 몇 회분을 사용해 그 인물의 과거를 자세히 돌아보는 묘사는 더욱 증가한다. 이 구도는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 뜨겁다, 난폭하지만 의지가 된다, 처음에는 무서워 보여도 사실은 상냥하다는 캐릭터의 갭을 돋보이게 한다.





거기에 더해 각 캐릭터에게 볼거리가 마련된다. 때로는 가슴 뜨거운 리더십이나 자기희생을, 때로는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서비스샷으로 그려진다. 억센 비바람과 강한 햇빛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도움을 받고 싶을 땐 씩씩하게 나타나고,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소중하게 껴안고 안심시켜주는, 마치 피치 공주를 구하러 오는 마리오 같은 남성상은 지극히 전통적인 동화 속 왕자님이다.







동화 속 남녀 구도에 인물의 복잡성을 덧댐으로써 성립되어 온 것이 바로 ‘마가렛’ 잡지의 정통파 소녀 만화이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귀멸의 칼날”이 여성 오타쿠층만 노린 게 아닌, 더욱 폭넓은 연령층 여성들의 욕망에 접근하여 순정만화나 트렌디 드라마에 맞는 소비를 촉진시킨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욕망이란 미소년 흡혈귀에게 쭉쭉 빨리고 싶은 도착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정통하고 범용한 ‘지켜줘’, ‘도와줘’, ‘사랑해줘’라는 전통적인 소녀의 욕망이다.




과거 순정만화의 갈등





전통적인 소녀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판타지가 이용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 한때 디즈니 영화는 온갖 동화 속의 독과 잔학성을 표백해 스테레오 타입의 공주 욕구를 구축했었다. “베르사유의 장미”, “왕가의 문장” 등 순정만화의 마스터피스 또한 때로는 특수한 시대와 장소 설정을 필요로 했다. 그것들은 모두 여성의 욕구에 부응하고, 또 작가가 가진 페티시를 반영하는 형태로서 정면으로 접근해 오는 것이다. 필요한 요소들은 빠지지 않고 세세하게 담기고, 그림동화의 잔혹성이나 역사의 복잡성 등 ‘심쿵’에 필요하지 않은 요소들은 생략되어 가려운 곳에 손이 닿는 것이다. 본래 “귀멸의 칼날”이나 “킹덤”에서 심쿵하는 장면을 찾는 것보다 훨씬 효율은 좋다.





다만, 당연히 그 욕망에 우직하게 응하는 표현은 스테레오 타입의 성적 역할 분담의 가장 메이저한 재생산이라고 하여 점점 수정되고 있다. 스테레오 타입의 공주를 양산해 온 역사와 자본적인 존재감을 지닌 디즈니를 보자. 미국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담당하고 있는 이 회사는 재빨리 탈피를 모색하고 왕자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미래를 여는 여성이나, 다양한 동물이 서로의 능력과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회와 같은 노골적으로 PC한 설정과 이야기를 대두시켰다. 그 전환은 극단적으로, 1992년 공개된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2019년 실사 “알라딘”에서의 변화나 “겨울왕국”, “모아나”의 히로인 조형에서 나타난다. 어찌 보면 자립적이고 강하고, 스스로 싸우는 여성이 새롭게 스테레오 타입이 되어가는 것이다.






디즈니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일본에서도 많든 적든 드라마나 영화로부터 전통적인 소녀의 욕망이나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상은 존재감이 약해지고 있다. 특히 대자본이나 남성에 의해서 그것이 그려지는 것에는 뚜렷한 거절이 생겨나고 있다. 이때 여성 캐릭터들은 디즈니의 새로운 히로인들이 안고 있는 것과 같이 갈등, 즉 왕자에 의한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고, 그리고 영상에 나올 만큼은 아름답고, 자신의 발로 미래와 정체성을 개척해 나갈 것을 요구받았다. 그 결과 여성의 능력은 점점 극단적이게 되었고, 생생한 일상을 사는 평범한 여성들과는 관련이 약해진다는 문제가 생겼다. “원더우먼”(여주인공이 존나 셈)에서 “오마메다 토와코와 세 명의 전남편”(주인공이 여사장)으로까지 확산되는, 평범한 여자가 주역을 맡을 수 없다는 현상에는 평범한 여자의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좌절감이 없지 않다.






순정만화에 대해 말해보자. “귀멸의 칼날”, “원피스”, “진격의 거인”, “주술회전”, “도쿄 리벤저스”, “스파이 패밀리” 등 소년만화에서 세대나 성별을 초월한 대히트작이 차례차례 기록을 세우는 가운데, “유리가면”이나 “꽃보다 남자” 등 왕년의 대인기작을 넘어서는 눈에 띄는 히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소년만화에 여성 독자가 흘러들어가 ‘점프’나 ‘매거진’이 이미 성별을 초월한 잡지가 된 것이 현실이다.






평범한 남자아이가 노력을 거듭해 동료를 얻거나 어느 날 거미에 찔려 주인공으로서의 필연성을 획득하는 것이 소년만화의 기본적인 구조였다. 반면 평범한 여자아이가 안에 간직한 매력이나 복잡함을 어딘가의 특별한 누군가에게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순정만화에서 답습해 온 구조다. 즉 순정만화는 근대문학의 빌둥스로망(다양한 체험을 통해 주인공이 내면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을 바탕으로 한 소년만화에 비해 타자의 존재에 의존적인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그 성립조건 자체가 다소 PC하지 못하다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년만화에 있어서 전시대적인 히로인 상이 시대와 호응하여 고쳐진다고 해도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순정만화가 성역할의 분담으로부터의 완전한 탈피를 목표로 하는 것은 곧 지금까지 대변해 온 욕망을 일거에 버리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 래디컬한 문제다. 왕자님의 포지션을 카리스마적인 동성으로 치환한 “NANA”의 대히트는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디즈니처럼 새로운 노선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다. 익스트림 주인공에서는 역시 순정만화의 기본 구조가 무너진다.




시대의 요구와 용서받을 수 없는 것




그렇다고 과거 어떻게 보면 가장 스테레오타입화된 여성 캐릭터를 양산해 온 소년·성인 만화에 여성이 욕망을 거듭하는 것은 언뜻 대담하고 부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소년만화에서 남성의 욕망을 바탕으로 남성이 우위에 서는 남녀 구도를 그리는 것처럼 순정만화가 그 전통을 답습한다면 격렬하게 비판이 집중돼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판타지 요소에 의한 요상한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하나의 관용을 개척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성별과 세대를 넘어 최근에 히트한 소년·성인만화는 모두 ‘지금 여기’일 수 있는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이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즉 “귀멸의 칼날”의 남자 주인공이 여동생을 항상 등에 안고 그녀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네즈코가 혈귀화되어 부득이하게 인간의 판단력을 잃고 때때로 유아퇴행하는 존재로 변질되었기 때문이지, (다이쇼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지켜야 할 약한 여성상이나 ‘여자를 지켜 제 몫을 하는’ 남성상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깔려있기 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진격의 거인”의 히로인 미카사가 주인공 에렌을 믿고 옆에서 지탱하는 최고의 이해자로 남아 있는 것도, “스파이 패밀리”의 가족이 목가적인 쇼와시대 가족상을 빗대는 것도 이야기가 준비하는 엉뚱한 환경에 따른 필연성에 있는 것이지, 순진하게 고전적 성역할을 완전히 믿기 때문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유행병처럼 일본에서 대히트를 친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도 여주인공은 꽃미남 왕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만 토네이도에 날려 북한 땅에 불시착해 버렸다는 모종의 이세계 환경이 마련되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처음에 가정한 판타지의 설정-욕망과 이야기·캐릭터-욕망이라는 이분법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언뜻 보기에 이세계에서 일어나야 하는 필연성이 그리 강하지 않고 지극히 일반적인 일상에서도 충족될 수 있는 ‘평범한’ 욕망 또한 판타지 환경 정비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과거에는 리얼리즘 만화에서도 담당할 수 있었던 왕자님에 의한 구원이나 공주님에 의한 서포트라고 하는 전통적인 소망이 이제는 SM 취향이나 로리콘, 잔학 취향과 폭력 등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에서는 충족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 만화의 대표적 판타지 작품 하면 2011년 미완인 채 작가가 급사한 “베르세르크”가 떠오른다. 초반의 BL적 구도에서 많은 여성 오타쿠의 소비를, 혹은 여성이 차례차례 능욕당하는 전개에서 성도착적 욕망을 불러일으켰던 이 작품이 후기에는 남자 주인공과 그를 지지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지켜지는 여자들의 하렘이라는 매우 평범한 남자의 꿈에 따른 구도로 변화해간 것은 흥미롭다.






잔학 묘사나 직접적인 성 묘사는 줄고 럽코적 요소가 증가했다. 검과 마법이 있는 이세계에서 일어나는 필연성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또한 시대가 변하면서 마초적인 남자가 인기를 얻고 그를 사랑하는 여자들이 뒤따르는 뻔한 현상이 괴물에게 능욕당하고 아름다운 피부를 고문으로 찢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면,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다.




스테레오 타입의 공주님 소망이든, 스테레오 타입의 마초이즘이든, 시대가 요구하는 형태로 고쳐지는 것은 대체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작품을 메가히트급으로 끌어올릴 정도로 뿌리 깊게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욕망이다. 게다가 그것이 지금 현재 고문에 흥분하는 사디즘이나 어린 소녀를 능욕하는 페도필리아만큼이나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사회가 정치적 올바름, PC함을 얻어냈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





코토바 "만화의 현재"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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